바닐라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 이 글은 2019년 작성한 원고를 바탕으로 새로 쓴 것이다.

바닐라의 개략적인 과거사

흔히 서양에서는 바닐라를 세계에서 유일한 식용 난초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세상에 못 먹는 것 빼고는 다 먹고 다 효능이 있다고 말하는 우리 동양의 식문화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주장은 유효한데, 바닐라는 알려진 난초중 유일하게 맛으로 먹는 난초라는 점에서 그렇다. 약제실과 주방의 구분선이 더 또렷해진 오늘날, 바닐라는 오로지 그 고혹적인 맛으로 주방에 살아남았다.

스페인어로 식물의 꼬투리vaina를 이르는 말에서 변형된 바닐라의 기원은 본래 중남미이다. 토토낙어에서는 xa'nat, 아즈텍어로는 tlilxochitl라는 이름으로 바닐라는 이미 음식에서부터 향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바닐라가 유럽에 전래된 것은 스페인인들의 도래 이후에도 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지만 그 확산속도는 매우 빨랐다. 왕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바닐라는 빠르게 명성을 떨쳤고 왕립 식물원의 식물학자들은 토토낙인들로부터 바닐라 재배법을 배웠다. 그리고 1819년 프랑스인들에 의해 레위니옹 섬에 바닐라가 이식되고, 1841년 노예였던 에드몽 알비우스가 혁신적인 바닐라 수분법을 소개하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프렌치 바닐라의 시대가 열린다.

바닐라의 제조와 가공

바닐라의 생애

바닐라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식물로 기본적으로 20~30도가 유지되는 습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수명 자체는 긴 편이지만 수령이 10년 이상인 바닐라는 더 이상 상업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받기에 주기적인 택벌이 강요된다. 바닐라 생산의 주기는 기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마다가스카르의 경우 10월부터 수분 작업이 시작되어 주로 그해 연말, 늦으면 2월 초까지 진행되며 타히티의 경우 7월에서 10월이 된다. 공통점으로는 바닐라 꽃은 건조한 기후에 개화하기에 날씨에 따라 작업할 수 없을 수 있고, 개화 시간은 이른 아침이고 개화 이후 빠르게 작업해야 하므로 부지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바닐라의 고향인 멕시코에서는 이러한 바닐라의 까다로운 취향을 맞춰주는 바닐라 벌이 있어 지금도 벌을 이용해 바닐라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타히티와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모두 사람이 직접 수분하고 있다. 일 년에 단 몇 시간동안 개화하고 말기 때문에 많은 인력을 동원해 꼼꼼하게 확인할 수밖에 없으며, 전체 바닐라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시간의 절반 가까이가 이 과정에 소모되어 어느정도 비싼 원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바닐라의 수분 방법.

바닐라의 가공

이후 수확까지는 약 10개월이 걸리며, 이때부터가 본게임이다. 바닐라는 가공 과정동안 효소를 통해 바닐린을 비롯한 특유의 향기 성분들을 생성하기 때문에 가공 과정의 숙련도와 섬세함이 없이는 좋은 바닐라를 생산할 수 없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문화권별 바닐라 가공법이 다 다르므로 전부 따로 나열해야겠지만, 편의를 위해 가장 생산량이 많은 vanilla planifolia G. Jackson 기준으로 써내려가겠다.

바닐라 죽이기

마다가스카르와 레위니옹의 품종인 vanilla planifolia G. Jackson은 열개성dehiscent을 띄기 때문에 바닐라의 생장 활동을 멈추고 효소가 활동할 수 있도록 죽이는(killing, mortification) 과정을 거치나, 그렇지 않은 타히티 바닐라 vanilla x tahitensis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차이가 있다. 바닐라 죽이기의 경우 흔히 63~65도의 물에 3분 정도 데치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으나, 일부 농장의 경우 고열건조기를 도입하여 물에 담그지 않고 데우기도 한다. 이후 바닐라는 검은색 모포 등으로 감싸 햇빛을 차단한 채 65도정도의 온도를 유지, 효소가 활동하여 바닐라를 향기로 분해할 수 있도록 기다린다. 길게는 2주, 18일까지 기다리기도 하며, 꼬투리의 품질을 분류하여 가공을 다르게 하는 생산자들도 있다. 이 시간동안 효소는 바닐라 내의 글루코바닐린을 바닐린과 포도당으로 분해하여 우리가 아는 바닐라향을 만든다.
지역에 따라 다른 방식들도 존재한다. 멕시코의 경우 햇빛에 5시간정도 건조한 뒤 칼로리피코(calorifico)라는 암실에 바닐라를 널어놓은 뒤 60도에서 시작하여 온도를 조절하는 식으로 관리하여 유사한 결과에 도달한다. 페루에서는 끓는 물에 담그었다가 햇볕 아래 건조한 뒤 올리브유에 담그는 방식이, 프랑스령 기아나에서는 달군 재로 덮어 바닐라를 데운다. 럼으로 바닐라를 데우는 포티에식 처리법(Potier’s Process)이 문헌에는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예시는 현재 보고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취미로 바닐라를 기르는 경우에는 냉동고에 넣어 바닐라의 생장을 인위적으로 멈추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바닐라 말리기

바닐라 말리기를 통해 85%정도의 수분을 가지고 있던 바닐라는 용도에 따라 건조된다.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바닐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가공용 바닐라는 15~20%의 수분을 남길 때까지 건조하며, 그 자체로 판매되는 바닐라는 25% 이상, 최대 35% 이상 보존하기도 한다. 이는 주로 꼬투리의 길이에 따라서 결정되기에 수분의 양과 바닐라의 품질은 절대적으로 비례하지는 않는다. 바닐라를 말리기 위해 주로 햇빛 아래에 건조하는 방법이 사용되지만, 지나치게 뜨거운 햇빛이나 지열에 노출되면 가벼운 향들부터 날아가는 문제가 있어 바닐라는 주로 해가 뜨는 시간부터 정오 이전까지 짧은 시간동안만 건조가 진행된다. 건조하기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향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어두운 천으로 감싼 뒤 특별히 관리되는 암실에 보관되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덜어놓는 작업을 1개월 이상 반복해야 하는데 역시 매우 노동집약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바닐라의 수분 활성도는 일반적으로 효소가 활동할 수 있는 정도의 높은 상태가 계속 유지되므로, 바닐라향 역시 계속 발달한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경우 2021년 법률안 de loi du pays relative à l’organisation de la filière vanille이 통과되어 이러한 가공 과정이 법률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

바닐라 길들이기

흔히 길들이기(conditioning)라고 하지만 와인이나 치즈의 숙성과도 비슷한데, 원하는 정도로 마른 바닐라들은 길이와 수분을 기준으로 분류된 후 끈으로 묶은 뒤 종이나 라피아에 감싸 나무 상자에 넣고 통풍이 잘 되는 암실에 보관한다. 이 과정은 통상적으로 2개월에서 3개월 정도가 소요되는데, 마다가스카르를 중심으로 이 공정에 진공포장기를 도입하는 생산자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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