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죽음
La critique, c’est autre chose que de parler juste au nom de principes « vrais ». Il s’ensuit que le péché majeur en critique, n’est pas l’idéologie, mais le silence dont on la couvre : ce silence coupable a un nom : c’est la bonne conscience, ou si l’on préfère, la mauvaise foi. Comment croire en effet que l’œuvre est un objet extérieur à la psyché et à l’histoire de celui qui l’interroge et vis-à-vis duquel le critique aurait une sorte de droit d’exterritorialité ? Par quel miracle la communication profonde que la plupart des critiques postulent entre l’œuvre et l’auteur qu’ils étudient, cesserait-elle lorsqu’il s’agit de leur propre œuvre et de leur propre temps ? Y aurait-il des lois de création valables pour l’écrivain mais non pour le critique ? Toute critique doit inclure dans son discours (fût-ce de la façon la mieux détournée et la plus pudique qui soit) un discours implicite sur elle-même ; toute critique est critique de l’œuvre et critique de soi-même ; pour reprendre un jeu de mots de Claudel, elle est connaissance de l’autre et co-naissance de soi-même au monde. En d’autres termes encore, la critique n’est nullement une table de résultats ou un corps de jugements, elle est essentiellement une activité, c’est-à-dire une suite d’actes intellectuels profondément engagés dans l’existence historique et subjective (c’est la même chose) de celui qui les accomplit, c’est-à-dire les assume. Une activité peut-elle être « vraie » ? Elle obéit à de tout autres exigences.
Roland Barthes, Qu'est-ce que la critique?
비평이란 단순히 "진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이상이다. 비평의 주요한 죄목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것을 덮는 침묵에 있으며, 그 죄스러운 침묵의 이름은: 선한 양심, 원한다면, 악한 양심이다. (중략) 모든 비평은 (심지어 가장 교활하고 신중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 자체에 대한 암묵적인 담론을 포함해야만 한다. 모든 비평은 작품에 대한 비평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이다. 클로델의 말장난을 빌리자면, 비평이란 타자를 아는 것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비평은 결코 결과를 정리한 도표나 판단을 위한 체계가 아니며... (중략) 어떻게 이런 활동이 "진실"일 수 있는가? 비평은 전혀 다른 요구 사항에 복종할 따름이다.
기껏해야 저녁 메뉴를 골라주는 정도의 역할만을 기대받는 것이 이른바 미식가 내지 미식평론가의 역할인 현실 속에서 가장 자주 사는 오해는 하나는 비평이 가치체계를 강요함으로서 개개인의 기호를 부정한다는 것이며, 둘은 비평 역시 그러한 개인의 기호를 피력하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실은 전통적인 비평에서부터 신비평, 해체주의 비평이나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비평의 역할에 대한 어떤 입장에서도 긍정된 적이 없는 주장이다.
비평에 대해 공부하려고 있는 공간은 아니니 단순하게 현재 한국 식문화에 필요한 비평 담론인가를 간단하게 따져보자면 개인적으로는 위의 바르트같은 저자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실증주의 비평의 시각이다. 일단 서울에는 논의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로서의 음식의 종류 자체도 빈곤한 수준이지만 독해를 통한 창조는 커녕 맥락 없는 독해를 통해 의미 자체를 분실하는 경우가 잦다. 예컨대 피에르 에르메가 대표적으로 그저 유명하니까 베낄 뿐 그 누구도 그가 무엇으로 왜 유명해졌는지를 모른다. "이스파한"의 마지막 완성이 피에르 에르메의 고향을 상징하는 게뷔르츠트라미너의 알싸한 터치를 의식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그저 복제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복제를 잘 하는 것이 미덕인 모창 메들리의 연속이다. 위대한 스승들의 자취를 분해하는 것을 통해 그 가락을 익힐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고 그랑 셰프들은 정복과 순례의 대상으로만 남아야 하는가? 그들은 유적지도 교주도 아니다.
따라서 실은 현재 한국 식문화에 신비평이란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데, 구비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립해로서 유의미한 신비평을 논의하는 것은 피로는 크고 이익은 적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기한 바르트의 언급과 같이, 음식을 제작자의 고유한 맥락에서 구출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피에르 에르메로 돌아왔을 때 유독 서울에서 다른 파티셰들을 제치고 그의 복제품만이 쏟아지는 것은 초기에 과감히 그의 작품을 오마주라는 명목 하에 복제한 선도자들의 존재, 일본을 시작으로 한 에르메의 독특한 이력과 한 자리쯤 찾아내기 쉬운 그의 성공적인 사업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이다. 「메종 디올」과 백화점으로의 진출과 같은 문헌적 맥락으로는 읽히지 않는 문제들이 짚일 것이다. 아무튼 쇠고기 스테이크, 휘황찬란한 아뮤즈와 초라한 디저트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한국식 프렌치의 모습은 소비자들의 행태를 통해서만 설명될 것이다. 심지어는 "존맛탱", "맛없없" 등의 언어들 역시도 그들의 손아귀를 떠나면 비평의 대상이 된다. 이는 취향을 존중한다는 다원주의적 외관과는 반대로 철저히 자신의 주관을 무결한 공간에서 보호하려는 피동적인 언어에 다름 아니며 반대로 이 이상의 의견 표출을 공격이나 갈등으로 인식하는 반생산적 담론 지형을 드러내는 역할도 있다.
이와 같이 비평은 취향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계도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단지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고백의 장 역시 아니다. 단지 비평은 끊임없이 인식 아래에 존재하는 현실의 단면들을 언어를 통해 드러낼 뿐이다.
The analogy was that of the catalyst. When the two gases previously
mentioned are mixed in the presence of a filament of platinum, they form
sulphurous acid. This combination takes place only if the platinum is
present; nevertheless the newly formed acid contains no trace of platinum,
and the platinum itself is apparently unaffected: has remained inert, neutral, and unchanged. The mind of the poet is the shred of platinum.
T. S. Eliot, 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엘리엇은 비평가의 역할을 백금 촉매에 비유한다. 경험과 전통을 강조한 그는 개개인의 발현이 아닌 전통에 대한 깊이있는 경험을 통한 창작이 바른 길이라 여겼다. 비평가는 스스로 그러한 두터운 전통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개성이 아닌 초월적, 보편적으로 통하는 감각과 경험으로 나아가는 진보를 일어나게 만든다. 물론 엘리엇 본인마저도 이후 이 글을 형편없다며 깎아내린 바 이러한 견해를 전적으로 채택하라는 강요는 아니다(바르트의 그것이나 나의 그것 역시도 그렇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미성숙한 자기표현이 단지 식별 가능한 개인의 기호를 단 또다른 몰개성에 지나지 않는지 생각하면 이러한 그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껏해야 블로그와 유튜브 정도를 흝어보고 또 그런 것들을 재생산하는 수준에서 각자는 자신들의 솔직함-흥행이 수익/관심도와 직결되는 솔직함이다-을 근거로 다원성을 주장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OX퀴즈를 푸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음식의 문법인 조리법이란 덜 익히고 더 익히거나 더 넣고 덜 넣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플레이팅의 판단 기준은 포르노그래피와 동일하다. 그리스와 로마에 뿌리를 둔 인문의 긴 전통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각의 생리학부터 "재료 본연의 맛"을 주창한 프랑스의 퀴르농스키, 일본의 로산진을 거치면서 기드 미슐랭을 이해하고, 푸앙, 보퀴즈를 거치며 고미요를 관통해야 비로소 20세기를 지날 수 있다. 다짜고짜 레드제피와 아드리아, 칸 로카 형제를 꼭대기부터 쌓아봤자 기반이 없으니 건물이 되겠는가?
솔직하게는, 어느 방향을 취해도 좋다. 애초에 서양의 맥락에 있었던 적이 없음을 근거로 탈맥락의 미식을 주창하는 것도 기꺼이 반길 일이다. 기왕이면 에스코피에의 권위 뿐 아니라 조선 고조리서의 권위, 아니, 한식 그 자체의 권위도 같이 무너뜨리면 더 좋을 것이다. 조상들의 현명한 고조리서는 찾아봐도 지금도 숨쉬며 살아있는 현명한 이들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는 오늘날이 아닌가. 그저 현재에 복종하지만 않으면 된다. 복종하지만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