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동식 - 옥동식맛 곰탕

옥동식 - 옥동식맛 곰탕

서교동의 옥동식은 분명 황당한 대기로 인해 본 블로그에서는 게재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자꾸 예외를 추가하느냐고? 변명을 대자면 나는 분명 줄을 서지 않았다. 방문 시간이 한 시 반에서 두 시 내외였기 때문. 직장인의 점심시간으로는 NG이지만, 목적지 식당(destination restaurant)의 명성을 얻은 지금의 옥동식에 식사 시간을 비켜나가는 것으로 방문이 가능하다면 그러할 가치는 충분하다.

설렁탕, 감자탕 등 최근 한식의 탕반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옥동식은 이러한 탕반 문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돼지를 이용한 탕반으로는 경남 지역의 돼지국밥이 떠오르지만 국물을 내는 방식이 크게 다르며, 큰 틀에서는 맑게 낸 국물이 하동관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단순히 소와 돼지의 차이를 넘어 결국 옥동식만의 국물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맛을 낸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첫입보다는 중간이 더 맛있는 경험이다. 적절한 온도로 입안이 충분히 상기되고, 파와 김치 따위로 자극을 받은 채로 들이켰을 때 국물의 그림이 조금 더 그럴싸하게 현현한다. 하지만 커다란 놋쇠 속의 국물은 역시 스스로 전체를 품기에는 단조로울 수 있는데, 식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얇게 저민 다릿살이다. 저렴한 맛에 삶아서 먹는 경우가 많지만 조직의 질감이 숨막힐 정도이기 마련인데, 차가울 때 얇게 저미고 다시 보온한 듯한 두께는 이러한 단점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중국식 스프의 고명이나 라멘의 차슈와 같이 애초에 강한 주장을 가진 고명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국물의 가락에 맞추어 고기도 강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호흡을 이어주는 것은 생각건대 고추지로, 고추지의 선명한 매운맛은 유익함을 뽐낸다. 국물에 풀어넣는 용도의, 다데기-스러움도 아니고 단맛과 뒤섞이는 질낮은 자극도 아닌 선명한 고추향이 단백질과 단백질 사이에 건너붙는다.

이외에도 몇가지 디테일을 꼽자면 있겠지만, 결국 옥동식의 곰탕은 좋고 나쁨을 떠나 옥동식만의 영역에 배치된다는 결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쌀의 조리가 그렇다. 전통 방식인 토렴을 택했으되 국물의 탁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밥 자체의 풀기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아 첫 한 술을 씹었을 때 살아있는 밥의 향기에 놀란다. 밥의 정서적 자극을 간직한 탕반 따위가 있었던가. 공기에 눌린 채로 죽은 밥은 국물의 종이 되길 자처하지만 옥동식의 밥은 살아있는 주인이다. 강한 양념을 한 국물의 매개 역할에 충실한 공기밥에 익숙한 한국인 입맛으로는 좋음보다 낯섦이 먼저 다가오지만, 그 의의를 검토하기에는 충분한 존재감이다.

라면 이름에서도 보이는 한식 스프의 미르푸아, 무, 파, 마늘의 채수에 뒷다리살로 결을 얹어낸 이 국물은 아무리 짚어보아도 한식의 맥락보다는 옥동식이라는 단독의 맥락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룬지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얼치기같이 따라하는 가게를 찾기도 어렵고(서울에서는 썩 놀라운 일이다), 유사한 맥락의 한국 요리를 위한 영감을 떠올리기도 어렵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탕반 경험에서는 없는 부분을 더해줄 수 있으므로 경험적으로 유의미하고, 국물-건더기-고추지-국물로 이어지는 호흡, 썩 쾌적한 환경과 유명세 등이 어울려 식사 이상의 기억을 가지고 나가기에도 무리가 없다. 옥동식은 유의미한 플레이어이며, 앞으로도 그 동력을 이어나갈 것이다. 다만 이 독특한 국물을 내기 위해 사용된 고기가 다시 건더기로 등장하는 것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는가(심지어 그 맛은 썩 남아있다), 제아무리 훌륭한 부이용이나 다시라도 거쳐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뒷다리살 스프 역시 변형태의 등장이 가능하지는 않은가 하는 점은 미결로 남아있다. 결국 옥동식의 손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요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이드메뉴는 본메뉴의 빛을 가리는 수준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만두기계의 무성의한 피 두께에 숨이 막힌다. 이 환경에서 가장 편하게 제공할 수 있는 사이드 메뉴긴 하겠지만. 잔술은 옅은 곡향이 있어 안도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