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3년 봄 50주년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3년 봄 50주년

일제시대 조선을 상징하는 두 곳의 호텔이 있었는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건설한 조선호텔(現 웨스틴 조선호텔)과 그 호텔에서 쫓겨나 화가 난 기업가가 만든 반도호텔이 그곳들이다. 조선호텔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반도호텔은 신격호의 롯데에 인수되어 철거된 뒤 새로이 재탄생했다. 의문스럽게 크게 마련되어 있는 쇼핑 아케이드, 라운지 이름의 '페닌슐라'는 이 반도호텔 시절의 흔적이다.

일본인 자본이 아닌 재일교포 자본으로 건설된 이 호텔은 일본 건설사인 가시마(유명한 "하나오카 화해"의 그 가시마다)에 발주했다가 다른 제네콘인 도다로 넘어갔는데, 하여간 당시 일본의 건설사까지 끌여들였을 만큼 그 포부란 엄청난 것이었다. 기존 반도호텔 부지에 더해 국립중앙도서관(옛 총독부도서관), 아서원 부지까지 더해 거대한 프로젝트로 추진된 롯데호텔은 정권의 커다란 비호가 있었을 만큼 1970년대 대한민국, 그리고 롯데 두 주체에게 모두 거대한 사업이었다.

그렇게 50주년을 맞는 롯데호텔 서울은 찬란한 역사에 불구하고 다소 궁색해 보인다. 일제나 군부의 권력과 엮여있는 처지는 신라, 조선이라고 하여 다를 바 없으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호텔이 지니는 위상이 그렇다. 모기업은 남쪽으로 심부를 옮긴 듯 새 건물을 짓더니 급기야 호텔 브랜드마저 새로 출범했다. 식음료만 보았을 때에도 마치 신구가 나뉘는 듯 시그니엘 서울에는 젊은 셰프 야닉 알레노의 캐주얼 브랜드가 들어섰다. 소리소문 없이 피에르 가니에르의 이름이 사라진 1층의 베이커리, 신라호텔에 한식당이 없을 때에도 자리를 지켰지만 스타 마케팅에 편승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궁화 등 롯데호텔 서울의 식음료 부문은 호텔 고객들에게 꾸준한 서비스를 제공할지언정 서울이라는 도시의 입맛을 이끌어가는 역할에서는 철저히 뒤쳐지고 있다. 피에르 가니에르는 이와 달리 독보적 위상을 자랑했지만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이 발간된 이후 그 명성에 흠집이 나고 말았다. 3스타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랑 셰프의 레스토랑이지만 정작 가이드의 평가는 2->1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형적인 프랑스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 자체가 거의 없는 현지의 환경 등을 고려해야겠지만, "피에르 가니에르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인가? 롯데호텔은 그러한 가치가 있는 공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롯데호텔 서울이 오래도록 만족할 만한 응답을 내놓지 못한 것도 일견 수긍할 만한 견해이다.

그 속에서 준비된 50주년 메뉴의 과제는 선명하다고 생각한다. 보여주어야 한다. 왜 롯데호텔 서울이며, 왜 피에르 가니에르여야 하는가? 물론 출점 당시의 가격에서 거의 변동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격도 바꿨다. 무슈 가니에르도 오랜만에 찾은 소공동 지점에 오래 머무르며 고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다 준비된 가운데, 그 요리는 준비되었나? 이제부터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요리

Feuilleté

시작은 다소 불길했다. 가니에르가 와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불유쾌한 지점은 구제의 온도와 질감이었다. 슈 반죽은 냉동해서 보관해도 금새 잘 살아나지만, 식전에 이걸 먹는 이유를 완전히 잊은 듯한 느김이었다. 그뤼에르 치즈에 염장육까지 더한, 숙성된 단백질과 염분이 입맛을 일깨우는 감각이 거의 죽어있었으며 반죽의 치감 역시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구성이 평소와 달리 흥미로운 편이었기에 이는 더욱 아쉬움으로 남는데, 앞뒤의 전갱이, 바질은 그 향이 명료하게 살아있었다는 점에서 빈 공간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리큐르 종류를 쓴 듯한 베린은 평소 발전하지 못한 기술을 사용한 소르베에 비해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단맛의 뉘앙스가 납작해 클렌져가 아닌 단순한 디저트를 먹는 듯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파리와 서울이 같은 레시피를 쓴다고 했는데 레시피 자체도 조금은 다르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밀가루와 버터의 차이라고는 볼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격차라는 뜻은 아니다. 서울의 캉파뉴는 조금 더 숨쉬기 편한 느낌이지만 껍질은 만족스럽게 발달했다.

Aiguillettes de canard fumé par nos soins, navet croquant, nashi; Glace bleu d'Auvergne, suc de Porto, Chair de crabe royal au beurre Nantais, fruits de la passion; Royale d'asperge verte à la cardamome; Pointes d'asperges vertes enrobées de pistachees concassées; Langoustine poêlée, glacée d'un sirop d'oignon doux au whisky

따지고 들기 전에 발상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애독자라면 사과의 연출이 중복이라는 점이 눈에 띌지 모르겠다. 그보다도 통상 이런 연출에서 주재료의 중복을 피하던 가니에르지만 갑각류의 2종류, 아스파라거스의 2종류로 치고 들어왔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서유럽에서 절정을 맞은 아스파라거스가 2접시나 자리했는데, 이러한 그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게 될 것인가?

먼저 두 종류의 갑각류 요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중앙의 냉채의 경우 쓰여있는 것과 달리 딸기의 역할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데, 갑각류의 단맛과 과일의 단맛, 그리고 다시 과일의 신맛과 올린 드레싱이 어울리도록 되어있지만 그런 그림이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두뇌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신경감각이 의문을 표하는 듯 했다. 반대로 사과를 덮어 갑각류-양파-위스키-사과의 단맛을 엮어낸 방식은 훨씬 효과적이었다. 향의 뉘앙스를 이상적으로 구현했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온도와 질감이 전체를 충분히 잘 이끌고 있었다.

피에르 가니에르 특유의 스타일로 자리잡은 이런 형태의 서비스는 각 접시간에 이어지는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겹치는 향이나 맛이 뉘앙스를 이어준다면, 온도로는 차이를 강조하는 식이다. 그 대비가 선명하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각 요리 자체가 색이 진할 필요가 있다.

Glace bleu d'Auvergne, suc de Porto

푸른곰팡이 치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중간 요리는 그 뉘앙스를 훈연향으로 연결하고, 단맛은 포트 와인으로 연결하는 그물망같은 논리로 나를 사로잡았지만 쉬이 잘리지 않는 햄의 질감이 이 요리를 다시 미결로 남겼다. 아이스크림의 점성을 잡지 못하는 것은 오랜 문제였기 때문에 딱히 바라고 있지 않지만 단백질은 분명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다. 더 얇게 저미는 도구를 구비하거나 극단적으로 건조하는 등 세밀한 조정이 필요하다. 기왕에 그린 그림이면 완성을 해야 하지 않겠나?

Pointes d'asperges vertes enrobées de pistaches concassées

아스파라거스에 대해서는 주방을 탓하고 싶지 않은데, 오히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다. 무슈 가니에르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파리에서라면 이런 아스파라거스를 쓰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단맛과 쓴맛의 절묘한 조화, 그리고 한껏 피어나는 땅의 뉘앙스가 핵심인 아스파라거스인데, 어떻게 다듬어도 그 자체가 충분히 강하지 않으니 또 다시 상상의 영역에서 만족할 뿐이다. 호이얄로 만든 아스파라거스는 카다멈의 도움을 받아 한껏 그 향의 자극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아스파라거스의 푸른 향을 피스타치오로 이어낸다는 발상은 바다 건너편의 연인과 편지를 주고 받는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피스타치오도 아스파라거스도 이 땅에서는 푸르지 못하니 그리움만 더해졌다.

Rouelles de homard à la nacre, raviole plate aux herbes fraîches, brunoise de courgette et morceaux modestes à la coriandre fraîche, infusion gluante d'agrumes

객의 선호를 반영하여 바닷가재는 무슨 계절에도 매번 빠지지 않고 있는데, 이 비스크는 지난 COVID-19 위기동안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에서 내보였던 비스크에 비해 강한 전위성을 내보이고 있었다. 강렬한 신맛이 먼저 찌르고 들어온 뒤에 바닷가재를 조금 씹는 듯 하면 고수가 다시 몰아친다. 흔히 떠올리는 프랑스 남부식의 정겨움보다는 거의 열도의 더위에 맞먹는 강렬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게는 이것이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긴 코스이기에 내보일 수 있는 충격이다. 10만원 3코스의 요리에서 이런 접시를 내온다면 객은 당황하겠지만 3시간이 넘는 흐름에서는 마땅히 용인된다. 특히 고수로 이어지는 흐름이 아주 영악하게 즐거웠는데 몇 년 전 피에르 가니에르에서 선보였던 고수 쥴레와 함께 최고의 고수 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Oktom, soupe de poissons, ,ousseline de pomme de terre aux olives noires, tuile de parmesan

사용된 재료가 그 지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요리 역시 가니에르적 발상에 대한 동의, 그리고 실행에 대한 의문이라는 인상을 이어갔다. 감자 무슬린부터 두족류, 핵심 단백질로 켜켜이 쌓인 질감 속에서 소스로 빨려들어가 그 너머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듯 했지만 갑작스레 터널로 진입한 듯 그 전경은 사라지고 마는데, 지중해로 향하는 열쇠인 염도를 놓쳤기 때문이다. 올리브, 앤초비, 파르미지아노, 토마토.. 지중해(특히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에는 짠맛이 당기는 감칠맛이 있다. 각각 홀로도 짠맛과의 호흡으로 빛나는 재료인데 정작 이 요리에서는 그 조미를 드러내지 못했다. 생선에 소금을 많이 뿌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 재료가 가진 짠맛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요리의 색채를 드러내야 한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발상을 높이 사기 때문에 여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 더 완성될 여지가 있다. 앤초비로 간을 잡는 이탈리아의 영감을 더욱 드러냈다면, 파르미지아노 튀일을 달지 않기로 했다면. 이런 종류의 개입은 적절하지 않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 미련이 남았다.

Paupiette de veau aux ormeaux, Paris boutons à l'échalote; Chantilly de persil plat, touche de caviar

송아지에서 우유향을 연결해낸다는 방식은 파리에서 보았던 것과 너무나 놀랍게 일치하고 있었는데, 파리에서는 그 쾌락의 규모가 감내하기 어려워 부담스러운 지경이었다면 서울에서는 지나치게 수축한 느낌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용된 오세트라 캐비어가 역시 의도한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 있고, 그리고 그 연약한 부드러움이 핵심인 송아지는 과조리의 영역을 살짝 지나고 있어 살짝 섬유화된 느낌까지 있었다. 유지방만큼은 젖을 충분히 먹고 자라지 않는 국산 송아지(추측컨대)의 품질이 무색하게 풍성하게 잘 만들어내었으나, 결국 프랑스 중심적인 편의주의적 발상이었다는 점에서 역시 문제적이다. 아스파라거스와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Hamp de boeuf coréen, morilles blanches grillées, polenta cremeuse à la truffe noires, laitue braiser

굽기!를 물어봐야 한다는 데서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 나날이 현실과 분투하고 있음을 느끼는데, 어쨌거나 무슈 가니에르의 스타일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이런 20세기, 19세기적인 요리를 주인공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애독자라면 바라이스의 송아지를 떠올리실 수 있으리라. 로시니를 절정으로 하는 근대 부르주아 퀴진의 레퍼토리의 정점에 도전하는데, 트러플의 작은 지름이 눈물짓게 하는 느낌이 있지만 이런 요리에서 사실 그런 것에 집중하고 싶지는 않다. 반대로 트러플이 무겁다고 좋은 요리라고 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또 '주어진 현실 속 최선' 따위의 궁색함으로 끝나지는 않을 밝은 지점이 있었는데, 탄수화물에 스며든 지방부터 살덩이까지 이어지는 전체적인 무게감도 좋았지만 고기맛이 강한 부위와 트러플로 들이받기로 한 결정을 높이 산다. 안심 따위를 들이댔다면 푸아 그라의 부재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정밀함을 위해 열원을 모두 바꾼 가니에르의 주방에서는 사라진 뉘앙스를 더하기 위해 리큐르나 허브 등으로 위트를 더하는데 이 요리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 누구보다 그런 재치에 능한 사람이 피에르 가니에르 아닌가? 조향을 거꾸로 만든 대지의 향기와 같이 서울에서도 그의 발상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 텐데, 물리적으로 주방에 존재한다고 해서 역량이 더 많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Souffle aux Ginseng façon Pierre Gagnaire

특별한 코스의 디저트를 수플레로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 인생을 상징하는, 가장 가니에르적인 디저트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이상을 보여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가니에르의 방한 행사가 아니라, 롯데호텔의 비전을 보여줘야 하는 식사가 아닌가.

이 수플레 자체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다뤘으므로 반복하지는 않겠다. 굳이 하나 들자면 가니에르의 방한과 홍삼의 등장이 단순히 사이클이 우연히 겹쳐 발생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정작 이런 방식의 요리를 아주 관둔지 꽤 오래됐다. 발작 호텔의 가니에르에서는 아직도 메뉴에 김치가 활용되는 것과는 달리. 종종 재밌는 재료가 등장하는정도에 그칠 뿐이다.

Mignardises

그럼에도 한국 특유의 디저트 주방 문화-적당히 젊은 파티시에들이 빠르게 관두기를 반복하는 문화- 덕분에 디저트 영역에서는 재미난 시도가 많이 나오는 편인데, 흑임자를 이용한 일 플로탕트같은 것이 그랬다. 하지만 결국 본게임으로 편입되지는 못하므로(가니에르는 디저트에서만큼은 보수주의자이다) 잠깐의 즐거움으로 남는다.


총평: 그래서 롯데호텔 서울은 50주년을 맞아 자신들이 표방하는 럭셔리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는가?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이룰 수 없는 무언가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들게 만들었다. 무슈 가니에르는 언제나처럼 훌륭한 발상을 잔뜩 가지고 서울에 도착했지만, 실행은 그를 돕지 못한다. 송아지나 아스파라거스같은 재료의 선택은 서울의 현실에 대해 알 길 없는 외지인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에게는 동아시아 3개국이지만 상하이와 도쿄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 어쩌면 이 땅의 고객을 접대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아버린 프랑스인 셰프 드 퀴진의 사라져버린 열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관료주의적인 주방 바깥의 조직 문제일지도 모르고, 유럽, 미국인 일색이 아닌 다변화된 방문객으로 인해 신경써야 할 것이 늘어난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을 진단하고 해결하는 역할은 나의 역할이 아니다. 하지만 "좋았다/나빴다"로 표현하기에 50주년을 맞은 롯데호텔 서울의 기함이 되는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사정은 복잡하다. 요리가 단순히 주방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피에르 가니에르가 왜 유명한가, 그의 요리는 그의 영감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고향집부터 비틀즈에 이르기까지.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벽돌로 유리 궁전을 지을 수는 없다. 그 책임이 35층에 전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책하고 싶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좋은 그림만 보일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쓴맛을 감출 수 없다.

현실적인 지점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롯데호텔 서울은 많은 예외를 통해 지어진 건물이다. 이런 땅에서 럭셔리라는 것의 본질이 바로 그 예외성 아닐까. 박정희가 신격호를 불러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고, 실제로 이 호텔의 완공을 위해 단순한 편의 수준이 아니라 입법적 지원까지 뒷받침됐다. 법률까지 만들어가며 지은 호텔이라는 말이다. 그 무게를 알아야 한다. 기왕에 그 정도의 포부는 가져야 하지 않겠나. 주방이 아니라 다른 쪽에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분위기:

서비스:

음료: 와인 짝짓기 메뉴가 있었는데 이 역시도 관료주의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요리가 언제나 같은 페블레와 세글라와 가장 잘 어울리지는 않을 것을.

피에르 가니에르 파리 - 2023년 겨울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2년 겨울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1년 가을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1년 봄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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