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니예 - 2021년 여름

본문에 앞서 독자분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다. 왜 서양식 파인 다이닝인가? 수십만원 정도의 돈을 소비하는 방법은 아마 인류의 머리수만큼이나 다양할 텐데. 대부분의 경우 식사를 둘러싼 서양 문화의 경험이 선사하는 압도적 낯섦이 그 이유가 된다. 축하나 기념, 혹은 진지한 논의 등에 있어 상대방에게 격식을 차린다는 의미가 앞서는 경우다. 혹은 배부르게 먹는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다. 여러가지 요리를 내오니 일단 배부르다. 덕분에 국내의 식문화는 호텔 뷔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호텔의 얼굴은 여전히 프렌치 레스토랑도, 한식당도 아닌 뷔페다. 스테이크, 스시와 같은 특정한 조리 방식이나 가재나 게 등 특정한 식재를 먹는 기회라는 측면이 부각되는 반면 그것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인간은 소외된다.

그러나 나는 서양식 파인 다이닝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기능도 있지만 부차적이다. 주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격식만큼이나 즐거움, 즉 쾌락을 위한 식사라는 점이다. 격식이야 무도회에도 있고 군대에도 있다. 비교적 단순하게, 또 대량 조리를 거치는 뷔페는 이미 맛에 있어서 비교와 평가 대상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서양식 파인 다이닝은 이 둘의 타협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 존재해야 하는 문화가 아닌가? 그 다음에서야 이제는 일종의 인문, 또는 예술, 언어 등으로의 요리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견지하면서, 글을 열어보고자 한다.

방문 전

스와니예의 예약은 온라인으로는 네이버 예약과 캐치테이블, 그리고 유선상 예약 또한 가능하다. 예약시 컨펌 콜을 한 번 하고, 방문 전일과 당일 별도의 확인 전화는 하지 않는다.

요리

스와니예의 리뷰는 한 접시 단위로 시계열을 늘어놓고 펼치지 않겠다. 이를 다루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스와니예는 일정한 개념을 제시하는, 즉 컨셉트를 가지고 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을 표방한다. 대중음악에 있어 콘셉트 앨범이 만들어지듯이, 데이빗 보위가 지기 스타더스트로, 비틀즈가 페퍼 상사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듯이 스와니예는 매 분기 요리를 통해 어떤 주제를 표현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에피소드라는 형식으로 주제를 달리하기도 했으나, 이번 분기부터는 현대 서울 음식이라는 한가지 콘셉트가 자리잡았다. 그 콘셉트의 구체적 내용은 홈페이지 설명문으로 갈음한다:

스와니예가 추구하는 음식은 ‘현대 서울음식’으로, 한국이라는 전통성과 다문화적인 현대성이 유기적으로 혼합되는 서울의 느낌을 담아 매 시즌 새롭게 바뀌는 메뉴와 경쾌하고 활기찬 서비스를 통해 유쾌하지만 격이 있는 레스토랑 경험을 선사합니다. 음식의 기본 베이스는 로컬 재료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세워진 한국이라는 뼈대에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음식스타일이 매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며 맛을 구성합니다.
http://soignerestaurantgroup.com/wp/soigneseoul/about/

이는 메뉴판에서 다시 보양과 12절기, 발효라는 한국 식문화의 정서적 측면, 산과 바다, 대지라는 입지의 측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조리서와 식습관, 추억이라는 주방의 사견의 삼분면으로 나뉜다. 여기서부터 독자들이라면 이제는 많은 것을 의심하는데 자연스러움을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의 고조리서는 반복해 이야기했다시피 카렘이나 에스코피에의 저서와는 달리 이 식문화에 전혀 녹아들지 않은 부분이 대부분이다. 흑윤이 대표적인 실패의 예시로 중국 대륙의 것으로 추정되는 요리를 전통이라고 들이미는 경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보양이나 발효는 각각 내수용 그리고 수출용으로 개발된 듯 엉성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주제들 자체는 마침 삼복 더위를 맞아 개고기 파는 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개를 잡으니 보양이요 된장을 쓰니 발효렷다. 그래, 메뉴판 앞장을 두고 너무 많은걸 판단하려고 든다고? 요리와 함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먼저, 스와니예의 식사 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전형적 서양식 정찬의 예를 따르는 듯 하되 그렇지 않다는 점에 있다. 말인즉슨 첫째로 빵이 없다. 아니 없을 수도 있지, 아예 탄수화물인 접시-파스타와 리조또-, 혹은 튀긴 반죽이나 타르틀렛 등에 기대는 등 개별적인 요리에 이미 흐름이 고려되어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경험해보면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가금류와 포유류의 사이에서 스파이스와 동물의 풍미를 지닌 소스와 그렇지 않은 소스의 간극은 단지 와인으로 닦아내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각 소스가 점도나 농도에 있어 특별한 점이 없음에도, 특징 없는 바게트 하나가 절실해진다. 사육기간이 기껏해야 90일 전후 되었을까 싶은 닭은 다릿살을 썼음에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는 풍미가 역시 모자란데 비하여 지방과 풍미 모두 풍부한 돼지고기는 전혀 뉘앙스가 다르다. 결국 코스 진행임에도 각 요리들은 점과 점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다.

둘째로는 무게중심이 거꾸로 된듯한 구성, 쏟아내는 아뮤즈부쉬와 그 이후의 힘 빠지는 코스 자체의 문제다. 코스의 시간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한 개, 두 개씩 내는 아뮤즈부쉬 하나 하나는 그럴싸한 재미가 있다. 코코넛을 올린 관자나 패션프루트 폼과 같은 요리는 "현대 서울 음식"이라는 주제와는 전혀 맞지 않지만 항상 새로운 재료에 도전하는 요리사의 열정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 듯하여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이유를 보여주지 못하는 요리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뻣뻣한 맛없음이 느껴지는 스낵오이로 만든 오이선, 극단적으로 높은 지방 속 풍미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간과 베리류의 짝의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스러지는 닭간과 블루베리가 그랬다. 그러나 이들의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문제는 이러한 아뮤즈, 즉 재미가 본론이 되어야 할 요리들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송어알, 관자 등 짠맛savory 요리들과 적극적으로 교섭을 시도하던 열대과일은 코스 내내 배제되며 전형적인 디저트로 다시 등장할 뿐이고, 그 자체로는 국내의 식재료가 아닌 것들, 낚시 미끼나 동물 사료로 유통되는 닭간부터 지중해 요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호박꽃, 서양식 가금류 가공 방식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리예뜨 따위가 등장하지만 가정식을 표방해도 좋을 안전한 수준에 머무른다. 주키니 꽃이 아닌 호박꽃, 속이 리코타나 모차렐라가 아닌 리예뜨니까 창의적이라고 해야할까? 반죽의 바삭함과 짭짜름함이 식전주와 어울려 입맛을 당겨야 할 이 요리는 리예트의 무게도 무게지만 납작한 옥수수의 비루한 단맛과 어울려 벌써부터 식탁 위의 결말을 내린 기분이었다. 그나마도 회수마저 되지 않는다. 닭다리에 복숭아를 곁들여보지만 패션프루트의 미친 신맛이나 코코넛의-비록 이 요리에서는 아니었지만-농익은 지방의 풍취와는 전혀 다른, 일본종의 안전한 단맛으로 머물러 과연 짠맛 요리에 과일을 쓰는 레시피로 보여주고픈게 있었을까 의구심만 키운다.

여기까지, 어딘가 전형적이지 않은 구성이라는 지점을 "현대 서울 음식"이라는 주제와 결합하면 어느정도 정당화 가능할지도 모른다. 탄수화물의 부재는 식전빵sikjeonppang 문화에 대한 , 시간을 끄는 아뮤즈부쉬 중심의 코스 구성은 배부름을 걱정하는 문화에 대한 답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당화 불가능한 특징도 있다. 바로 조리다. 굽기가 나쁘네 좋네 수준의 노베이스 수준의 인상비평이 아니라, 프로의 레벨에서 어떤 조리를 하느냐에 대한 문제다. 스와니예의 조리들은 명백히 현대 조리기술을 기반으로 한 요리에 도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활용하는 이유를 보여주지 못한다. 오늘날 바우하우스 이후 기술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에 이는 중대한 문제다. 다 따지고 들면 복잡하니 한가지 요리로 예시를 들어보겠다. "수박과 파프리카", 수박을 압축한 것을 쓴다. 맛보는 즉시 나는 켈러 선생님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수비드로 인한 주방의 혁신의 결과물 중 하나인데, 본래 수박이라는 재료는 서구에서는 천박한 취급을 받아왔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흑인에 대한 차별의 코드로 통하고, 프랑스인 뒤마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빈곤층을 "피자랑 수박 먹는 자들"이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수박이 왜 갑자기 격식 있는 식탁에 기어올라왔는가? 수비드로 인한 주방의 혁신을 몰고온 토마스 켈러의 책 「Under Pressure」에서 수박을 수비드로 조리해 밀도를 높여 마치 소고기같이 만들고, 거기에 역시 분자요리로 만들어진 망고 노른자를 올려 수박으로 만든 스테이크 타르타르라는걸 만들었다. 켈러 선생님과 전혀 무관한 마리포사에서도 보이는 기술인데, 토마스 켈러 알럼니로 그가 직접 소개하기도 했던 이곳의 셰프라면 당연히 이를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compressed"라는 표현을 직접 쓴다면 역시 켈러 선생님의 제자인 부숑의 Mark Hopper가 처음 사용한, 고압 수비드로 과육의 변성을 이끌어낸다는 맥락을 포함했다는 거니까. 이를 통해 켈러 선생님께서는 채식인에게도 소고기의 즐거움이라는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재미는 켈러 선생님의 금고에 꽁꽁 묶여있지 않아서, 이 책의 출간 이전 알리니아의 주방에서는 수박으로 다랑어 스시를 만들기도 했다. 그들의 요리는 맥락은 통하되 아이디어에 있어서 발랄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스와니예의 주방에서 수박은 그저 수박인데, 심지어 그 자체로도 그다지 다가오는게 없다. 밭에서 갈라먹는 뜨거운 수박의 상쾌함도 물이 풍성한 과육이 주는 특유의 질감도 아닌, 수박의 가공품으로서 수박. 가즈파초? 과연 이 수프에서 감칠맛과 거친 질감을 빼면 이건 뭐가 되는걸까?

다음으로는 스스로 제시한 콘셉트들의 문제다. 가장 악취를 풍기는 문제는 "고조리서"다. 이곳의 셰프가 인터뷰에서 참 많이도 언급한 「군학회등」 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반죽구이. 한식재단을 통해 원문을 볼 수 있는데,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이야기가 편하게 갈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凡燒肉用簽子插於炭火上,蘸油醬細物料酒醋調真麫薄糊,不住手勤飜,燒至熟剝去麫皮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고기를 구울 때는 꼬챙이에 고기를 끼워 숯불 위에 놓고 고기에 기름, 간장, 각종 양념, 술, 식초 등을 밀가루에 섞어 만든 묽은 죽에 찍어 쉴 새 없이 손으로 뒤집으면서 굽는다. 고기가 익으면 위에 있는 밀가루 반죽 껍질을 제거한다.

그는 이것을 두고 수백년 전부터 조상들이 수비드를 알고 있었다며 격찬한다. 그림이 좋다. 잊힌 한식의 역사에 서양 셰프들도 몰랐던 지혜가 있다니! 그것을 되살리는 한국인 셰프와 한식재단. 찬란한 한국의 식문화, 대단한 한국 셰프!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당장 저 문헌을 두고 수비드가 떠오르는가? 익숙한 요리로는 먹을 수 있는 반죽을 입히는 비프 웰링턴이나 패스트리 반죽에 굽는 요리들이 떠오르고, 반죽을 버린다는 점에서는 점토구이à la d'argile 또는 croûte d'argile, 단순히 argile로 부르기도 한다가 떠오른다. 반죽으로 직접 열원에 닿는 것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점에서 이쪽이 더욱 통한다. 이런 조리법은 프랑스가 아니라 중국에도 있다. 거지닭이 그렇다. 이런 조리법들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그럼 수비드를 무슨 과학혁명처럼 전파해온 데 칸 로카와 elBulli, 그리고 스승인 켈러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은 바보라서 전통적 조리법 대신 수비드를 했을까? 그들은 단지 조선시대의 미상의 인물보다 못한 양인들에 불과한가? 당연히, 당연히 그렇지 않다! 수비드의 핵심은 표면이 직접 닿지 않는다는 점 뿐 아니라, 전체를 균일한 온도로 감싸는 정밀함, 단백질의 변성의 수준의 완벽한 통제로 향하는 치밀함에 있다. 이에 더해 기계의 압력을 이용한 진공포장은 수비드 조리의 독특한 부드러움의 보존에 기여할 뿐 아니라, 앞서 수박과 같은 예시가 가장 잘 보여주듯이, 원하는 질감을 창조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켈러 선생님께서 수비드를 "압력, 온도, 시간"의 삼박자로 요약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군학회등의 조리법에는 우선 압력이 없다. 진공포장에 비해 표면의 보호도 불완전하고, 애초에 한 방향에만 존재하는 열원에만 익히니 수비드와 연관을 짓는게 맞는지 모르겠는 수준에 이른다. 강점이라면 반죽 자체를 양념처럼 입히는 형태이므로, 무미의 표피를 둘러쓴 수비드나 점토구이와 달리 반죽의 풍미가 베어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애초에 마리네이드라는 단순한 방법이 앞선다; 당장 소금간만 해도 주사기로 하는 요즘 시대다. 어쨌거나, 이는 문헌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요리에 대한 결론을 내야 한다. 바 형태로 되어있는 공간에도 불구하고 이 조리를 직접 목격하기는 어려워 맛을 보는 것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데, 맛의 경우 맥락을 제거하고 보면 나쁘지 않다. 그 자체의 풍미가 짙기로 칭송받는 이베리코의 플루마등심과 목심 사이의 컷으로 그 모양에서 딴 이름이다는 크러스트가 아주 엷게 형성되다 말았는데, 단백질의 씹는 감촉이 좋고 민트를 통해 개방되는 감각 또한 그럴싸하다. 그러나 소스의 신맛과 버터의 풍미는 흔적의 단계이고 염분이 충분히 개입하지 않아 이베리코의 강한 풍미가 전체를 죽이는 모양새다. 고기만을 강조하기 위한 생각이라면 고육지책이라 불러도 좋고, 혹은 풍미의 짙음을 거부하는 한국인들의 입맛에 대한 헌사라면 그 유머 감각이 지나치다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조리 방법의 빼어남이 드러나는 지점이 없다시피 하다는 치명적 단점을 논해야만 한다. 스스로 내세운 콘셉트가 아닌가. 이래서야 군학회등이라는 책은 하등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물론, 차라리 그게 본심이라면 나는 동의하겠다. 몇 년 전 한복려 선생님께서도 우리 조리서를 두루 살피는 책을 쓰게 되면서, 우리 조리서들의 전반적인 특징에 있어 방법이나 수치 등에 있어 정확함이 없고 사용하는 단위마저도 서로 다른게 너무 많다 하신 적이 있는데, 알고 극복하는 선생님의 자세를 보고 많이 배웠다. 우리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아야 한다는 이상한 환상보다야 솔직한게 낫지 않은가. 그러나 「스와니예」의 요리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 환상을 공격적으로 이용하고 그 뒤에 숨으려 한다.

바지락 육수로 만들었다는 보리굴비, 시그니처라는 나물 따야린, 소르베에 아이스크림 연타로 때리는 디저트 등 개별 요리에 대해서 다룬다면 말이야 나오겠으나 비평으로서 글은 여기까지다. 스와니예는 이러한 지점들을 안전하게 엷은 맛으로 묶는다. 고맙게도 이날은 만석이었던 데다가 미식을 목적으로 한 듯한 열정적인 사진가부터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이들(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기 위해 가능한 노력했다!), 기념일을 챙기는 객에 나의 일행까지 다양한 객들이 주방과 호흡하는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라는 간판에도 불구하고 미세조정fine tuning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알러지야 미리 밝힐 수 있겠지만 자리에 앉은 이후 요리는 어떤 피드백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의 같은 소스팬에서 나온다.


총평: 스와니예가 내세우는 현대 서울 음식Contemporary Cuisine of Seoul이라는 개념의 민낯은 처참하다. 식사가 끝나고 주어지는 해설 격의 인쇄된 메뉴가 보양과 12절기, 발효를 "한국인의 신념과 삶의 방식이 녹아들어 만들어진 인문학적 특징"으로 말하는데, 한국인, 삶, 그리고 인문학 모두에 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인문이 영어로 Arts다. 발효? 당장 빵과 발효를 떼놓을 수 없고 계절을 이야기하자니 남극에도 여름이 있고 24절기는 베트남어로도 읽을 수 있다. 특정한 시기나 날짜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문화는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렵다. 그럼에도 이것을 인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이 이곳에서는 어떻게, 왜라는 측면을 밝혀내야 한다. 사계절이 뚜렷해서 좋은나라라는 공교육의 강요, 발효하니까 우월한 식문화라는 관치질서 주도의 엉터리 한식세계화를 벗어나야 하는데 셰프가 그것에 앞장서고 있으니 탄식할 노릇이다. 그것도 한국도 아니고 서울의 식문화라? 동시대성? 유수의 석학들이 격돌하는 현장의 다른 이름이다. 각 분과학문에서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달력 기준으로 속 편하게 규정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런 장식적 요소들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과연 토마스 켈러의 그림자인가? 이곳의 셰프가 Per Se에서 스타지를 한 이야기를 언젠가 뉴스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가 켈러 선생님을 존경하게 된 이유는 그의 완벽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타지가 이력이 된다는 것도 슬프지만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까 치더라도 이제는 그 벅찬 감동을 느낀 때로부터 십 년이 가뿐히 넘지 않았나. 아마추어의 주방에서야 쿡북은 따라하기 위한 물건이지만 프로의 주방에서는 레퍼런스가 될 수 없는 고문서나 십주년을 맞아가는 켈러 선생님 책 모두 따라하는데 머무르라고 있는게 아니다.

아니, 설마 이 모든게 바로 현대 서울 음식의 현주소라고 말하려고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폭로만큼은 성공했다.

분위기: 좁은 간격과 주방의 낮은 볼륨이 형성하는 적절한 긴장감

서비스: 전형적인 한국식 레스토랑 서비스. 식사에 앞서 메뉴에 칵테일이 있길래 주문하려 하자 "너무 달기만 하고 술 못먹는 사람들 먹으라고 있는것일 뿐"이라며 한사코 만류하는 접객원의 배려는 돋보였다. 그래,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게 해서는 안되지.

가격: 테이스팅 메뉴 KRW 185000, 와인 짝짓기까지 하면 일인당 KRW 340000의 예산.

음료: 전형적 인기 지역, 인기 스타일 위주의 셀렉션. 짝짓기는 이해하기 쉬운 안전한 논리에 머물러 큰 재미를 선사하지는 않지만 실패는 없다. 짝짓기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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