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세리 트릴로지 - 담론 수입 이후의 과제

파티세리 트릴로지 - 담론 수입 이후의 과제

세드라의 모히또 바바와 같이, 전형적인 제과의 틀을 이용하면서 그를 변용하는 경우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 목적에 대한 고민이다. 예컨대 고전 레시피는 이미 완성된 그림과도 같은데, 그 위에 무언가를 덧칠한다면, 스페인의 <이 사람을 보라>가 될 수도 있고, 혹은 거리의 그래피티 질서 속의 "고잉 오버"타인의 그래피티 위에 덧칠하는 행위일수도 있다. 레시피에 이르지 않은 보편적인 아이디어들-오뚜기 카레와 김치, 라면과 달걀-을 다듬는 경우는 어떠한가? 이런 것들은 아직 거칠기 때문에 마구 다듬을 수 있을 듯 하지만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대리석 속에 이미 천사가 있었다"는 둥의 이야기는 그저 겸양일 뿐이다.

이러한 행위를 결국 "왜"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다. 가장 우선해서는 생존 단위의 전술이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대도시에서 단순히 같아서는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 물론 같은 것속의 다름을 찾아내는 소비자들이 넉넉히 있다면 모르겠으나, 피에르 에르메와 100명의 클론들이 숨쉬는 도시가 아닌가. (이곳에도 "바닐라 타르트"가 있다) 그보다 배포가 있는 경우라면, 존재하는 식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요리를 할 수 있다. 그 자체per se로 완성된 요리들도 있겠지만, 많은 요리들은 어떤 이유로per quod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는가? 그 이유에 대한 탐색이 곧 요리의 열정이 되는 경우다.

트릴로지는 언제나 두 번째에 가까운 요리를 하는데, 전반적으로 피에르 에르메 이하의 프랑스 제과사들이 이끄는 근래의 바람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본다. 버터와 설탕, 알코올 등의 전통적인 재료가 아닌 과일과 향신료가 주인공으로 나선다. 녹차가 앞선 "베르",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과일들로 점철해낸 "익조틱", 그 이전에도 모두 그렇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의 담론을 한국에서 재현하는데는 여러 고민이 따른다고 본다. 일단 과일이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환경이다. 매년 장마철 강수량을 보며 과일의 품질을 걱정해야 할 뿐 아니라 그 품종마저도 빈곤하다. 사람들의 경험은 대부분 생과의 납작한 단맛, 감미료를 떠올리게 하는 그 기억에 젖어있기 일쑤다. 당장 열대과일이라고 하지만 신선하고 좋은 과일이라는 개념과는 병존하기 어렵다.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제주도산 레몬같은걸 쓰려고 한다면 파산이 앞당겨질 수 있다. 결론은 국내 재배품이 그나마 익숙한 패션후르츠, 기타는 제과점 납품용의 냉동 퓨레가 맡는다.

앙트레멍이나 앙트르메라고 하자면 그 경험의 결말은 무스에 있어야 한다. 프랑스 제과가 자랑하는 질감의 대비로부터 한껏 내려앉은 부드러움이지만 짙은 풍미의 무스의 인상은 앞뒤의 경험들을 모두 지울 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익조틱"의 무스는 그 이름을 그렇게 표현해내지 못한다. 묵직한 지방과 단맛의 코코넛, 쓴맛과 신맛의 라임의 조화는 정석에 가까워 만만해 보이지만 라임은 섬세함을 요한다. 코코넛을 중심으로 하는 열대과일 요리 중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인 피냐 콜라다를 떠올려보라. 라임은 파인애플이 할 수 있는 일을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케이크의 나머지인 열대과일들이 조합된 부분에 있어서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인상의 또렷한 단순함에서 오는 복잡함니다. 바나나의 옅은 단맛이 발향하지만 이외에는 백향과의 씨앗이 씹힐 때 즈음이면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여러 과일의 조화, 의외의 맛의 개입을 통한 어떤 효과의 의도 등은 여러모로 피에르 에르메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 에르메의 혁명, 제과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인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인 질감의 다듬새, 그리고 맛의 균형에 있어서는 적절한 완성도를 지녔지만 빼어난, 인상적인 요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유보에 가깝다.

피에르 에르메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한 데 있어서, 이스파한이니 등등 피에르 에르메의 귀신을 좇는 경우와 비교의 대상으로 내려앉지 않는다. 과장 보태서 아직도 에르메 좇기, 혹은 그 껍데기를 덮어쓰는데 급급한 제과의 현실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완성에 이르는 답은 결코 아니다. 이제는 INBP와 르 꼬르동을 넘어서 별별 제과 학원 출신 제과 학원들이 포화에 이르렀고 가끔은 제과 주방에서 장단기로 일해본 경험 등을 내세우며 앞다투어 개업하는 케이크 가게들도 더 이상 찾아가고싶은 열의가 생기지 않을 만큼 생겼다. 나는 이제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본다. 결국 그 본질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유명한 프랑스인들의 스타일은 결국 밟고 있는 땅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데, 과연 우리의 삶의 흐름 속에서 제과의 의미는 무엇인가? "카페 투어"를 위시로 한 투어리즘의 관광 대상, 혹은 시각 미디어를 가꾸어줄 스노비즘의 대상인가? 단지 외국말로 점철되어 외국인들이 즐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는 방향을 정한 뒤 가는 길을 논해야 한다.

글을 맺으며 나는 한 사람의 주장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제과는 행복의 순간이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식사의 끝에 다다라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취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몸이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쾌락의 순간에 이 감정은 이미 자비로움에 안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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