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소사이어티 - 이제는 수퍼 그만

아이스크림 소사이어티 - 이제는 수퍼 그만

플랫폼을 옮긴 뒤 가장 먼저 쓴 글들 중 아이스크림에 대한 들이 있었다. "농담은 그만"과 "이제는 제발 그만"이었다. 그 후속작이 나오게 될 줄이야.

두 번째 글에서 두 가지 맛에 KRW 12000을 두고 국내에서 가장 높은 가격이라 불렀는데, 아이스크림 소사이어티의 한 스쿱은 KRW 7000, 세 스쿱 컵은 KRW 17000이다. 포 시즌스 호텔 서울의 보칼리노가 제공하는 KRW 9000의 젤라띠와 소르베띠의 거대한 덩어리 크넬과 견주어 맞먹는 가격으로, 스스로 내건 가격만 보면 기록 갱신이다.

원래 이런 배경을 가진 가게는 섣불리 찾거나 글을 쓰지도 않는다. 어차피 오픈 초기에는 관계자 및 지인들의 방문과 축하가 이어질텐데 굳이 불청객으로 끼어들 이유가 없다. 그리고 레스토랑이라면 적어도 서비스의 발을 맞출만한 여유가 필요하다. 프로에게 굳이 그런 양보를 할 필요는 없지만, 전부 새로 고용된 입장에서는 프로라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게 많지 않은가. 오픈 초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강민구 셰프의 솔직한 인터뷰가 좋은 예시다. 객들이야 격찬을 아끼지 않더라도 그 속내는 이럴 수 있는 법이다.

서론을 질질 끌 것 없이 버스데이 케이크, 라임 파이 그리고 피칸 파이 세 종류를 담았다.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요리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스프링클을 뿌린 케이크라고 하면 모모푸쿠 밀크 바의 BDAY 케이크를 잊을 수 없으며, 라임 파이는 바하마로부터 전미로 퍼진 키 라임 파이, 피칸 파이는 멀리갈 것 없이 피칸의 고향인 북아메리카 대륙의 요리다.

사실 이쯤되면 나는 여러분도 아이스크림 가게의 메뉴를 읽는 요령을 알리라 생각한다. 당장 우수 살롱의 글에서도 언급했으나 반복하겠다. 서울에서 피오르 디 라테가 있다면, 그리고 그걸 추천한다면, 조심하라. 우유의 꽃이라는 이름처럼 우유 그 자체의 잠재력이 곧 아이스크림의 품질을 좌우하는데, 우유에 그렇게 신경쓰는 가게는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신경 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생일 케이크맛이 꼭 그랬다. 혹시나가 역시나로군. 거기에 더해 어중간한 당류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아이스크림이 추구해야 하는 총 고형분-지방-당의 삼박자가 아름답게 맞지 않아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입의 빠른 피로감. 쉽게 말해 맛의 부족이다. 맛이 부족한 가운데 단맛만이 반복되고 지방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니 고통스럽다. 스프링클은 단맛을 더할 뿐 맛(flavor)에 기여하지 않는다. 국산 우유의 텅 빈 맛은 어쩔 수 없는 가운데 질감도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김기태 선생님 작품이었을 우수 살롱의 소금을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차라리 그쪽이 그립다.

이쪽이야 원래부터 성공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생각하고, 본 게임은 메뉴판에 무려 세 칸을 차지하고 있는 파이들, 그 중 두개. 하지만 파이라고 다 같은 파이가 아니니까 재밌게 즐겨볼 요량이다.

키 라임 파이. 키 라임의 농후한 신맛과 그에 맞설만한 쓴맛을 강렬한 유지방과 단맛, 이 모든 것을 파이 반죽이 감싸준다. 뜨거운 여름에 먹어도 좋을만큼 강한 음식이다. 아이스크림은 어땠냐고? 파이 반죽을 짓뭉개 섞어두었고 화이트 베이스에 희미한 신맛, 놀랍게도 없는 쓴맛의 황당한 희미함이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내 혀를 의심하는 버릇이 있고 마침 이 근처는 평소에도 여러모로 다니던 동네이므로 알던 맛과 향으로 나를 스스로 다시 시험해보았다. 나는 그대로였다.

피칸 파이. 그냥 피칸도 아니고 피칸 아이스크림에 다시 캔디드 피칸을 올린다니. 나의 심장을 고동게 하는 유일한 레시피였다. 그래, 셰프 직함을 단 이들의 창의성이라면. 적어도 파이를 단순히 반죽 다져넣는 수준으로 쓸 게 아니라, 피칸을 아이스크림으로, 질감을 초월하고 풍미를 극대화하는 그 힘을 보여주어야지.

역시나 침몰.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는 레시피의 창의성 이런걸 논하기 전에 그냥 맛의 밀도의 문제다. 코타티 성수의 피스타치오를 넘어서는 옅음이다. 피칸을 아이스크림 믹스에 넣었음에도 피칸의 구수함을 느끼기 지나치게 어려운데, 고형분 총량을 늘리면서 당도를 유지하되 질감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결과 고형분이 제한되거나, 당분만 늘어나면서 맛을 느끼기 어려워지는, 전형적인 결말이다.

주문을 하며 커튼으로 가리워진 주방을 스쳐지나가듯 볼 수 있었는데, 칼피지아니 수직형의 익숙한 실루엣과 더불어 MEC3의 레디메이드 페이스트 통이 보였다. 물론 나는 이런 것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말하지만 썩어가는 십수년전 칼피지아니 수직형 배치 프리저도 괜찮은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사람이 잘 쓴다면. 페이스트? 밥비의 헤이즐넛과 피스타치오만큼 편하고 맛있는 제품을 국내에서 굳이 구하려고 고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패한 아이스크림과 이런 것들이 결합하면 이제는 일정한 경향성이 보인다.

이브 생로랑을 다분히 의식한 로고? 이런건 이제 그냥 좀 넘어가자. 피곤할 뿐이다. 하여간 액체 섞어 만드는 음식에게는 모두 공통되는 기준이 있다. 맛을 위한 음식은 진해야 한다. 추구하는 질감을 유지하되 맛의 농도를 잡아야 한다. 소스가, 칵테일이, 아이스크림이, 묽으면 그냥 그건 못 만든 물건이고 실패이다. 아이스크림은 만드는 과정 전체를 통제 가능한 공산품인 만큼 실패는 절대 우연일 수 없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같은 어는 점을 구하더라도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는 텍스처를 고민해야 하고, 당분을 조절한다면 보상을 고민해야 한다. 지방을 몇 프로로 구성할건지? 그리고 그 지방을 어떤 풍미로 선택할지? 이건 시작에 불과한 고민이다. 그러나 이 아이스크림에서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많은 서울의 mediocre한 아이스크림 가게들의, 습관적인 레시피가 느껴진다. 칼피지아니 젤라또 대학 졸업장을 걸어둔 곳들의 바로 그 맛을 무언가로 가리려고 하지만 가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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