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쉬레 버터 아이스크림 쇼다운

에쉬레 버터 아이스크림 쇼다운

이 게임을 시작한 건 사벤시아의 자회사인 베이크플러스에서 내걸었던 버터 홍보 프로그램이었다. 엘르&비르가 사벤시아의 버터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레스큐어는 고품질, 고가격 제품으로 자리잡기 위해 인기가 있고 권위가 있는 매장들과 지속적인 협업을 진행해온 바 있다. 그 일환으로 젠제로에서 레스큐어 버터맛 아이스크림을 낸 것이다. 나름 화제가 되었지만 이 이후로 젠제로에서는 버터를 이용한 젤라또는 나오고 있지 않다.

젤라또에 버터를 넣는 기획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사실 버터를 넣은 젤라또는 버터가 주인공이 아닌 형태로 이미 존재해왔다. 적어도 서울에서는 약 5년 정도의 기간동안 그랬다. 여러분이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유가 맛없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탈리아 요리에서는 모차렐라 부팔라나, 우유로만 빚은 젤라또와 같이 우유 자체의 맛에 의존하는 요리를 두고 "피오르 디 라테(우유의 꽃)"이라 부르곤 하지만, 우리의 우유는 그렇게 피어오를 수 없다. 생산량 이외에는 보답받을 방법이 없는 생산 방식, 남은 희망마저도 제거하는 유가공,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바꿀 필요가 없는 유제품과 거리가 먼 식문화가 어우러진 결과가 그렇다. 국산 우유는 우유의 기능을 가까스로 해내니 취향 운운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탓할 이유는 없다, 이건 시스템적인 문제이다. 하여간 그런 현실 속에서 대부분이 유제품으로 구성되는 디저트를 만드니 기초부터 부실하다. 이물질이 섞인 철근과 물을 타 양을 늘린 시멘트로 건물을 짓는 꼴이다. 프리츠커는 커녕 부실공사에 대한 우려가 더욱 가깝다. 그 속에서 궁여지책으로 동원하는 것이 다른 유가공품이다. 모자란 지방, 모자란 맛, 모자란 뉘앙스를 빌린다. 치즈나 버터, 때로는 유청단백까지 동원해 그 독특한 액체의 성질로 이름마저 유화(乳化)라 부르게 만든 신이 내린 선물을 인간의 손으로 재창조한다.

그렇게 탄생한 서울식 피오르 디 라떼의 계획이 제2막을 맞았으니 그 계기는 치즈앤푸드에서 에쉬레 멸균우유를 수입하게 된 것이었다. 사벤시아의 간판 버터인 엘르앤비르도 소매 시장에서는 LF의 자회사인 화인애프앤드비서비스가 유통하고 있듯이, 에쉬레는 기본적인 버터는 매일유업이, 100g와 20g 소형 제품과 멸균우유는 치즈앤푸드, 크림은 에스와이인터내셔널에서 진행하는 등 브랜딩은 커녕 병행수입 업체들이 난립한 채로 버려져 있는 실정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유와 크림이 모두 갖추어져 드래곤볼 모으듯 에쉬레로 구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결국 주인공은 그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버터가 될 수밖에 없는데, 과연 에쉬레 버터는 그런 탐닉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까?

시간 순으로 「더마틴」의 에쉬레, 「탕고(TAANGO)」의 에쉬레 그리고 도쿄에 위치한 「에쉬레 메종 드 뵈르」의 글라세 에쉬레를 모두 맛보았다. 과거의 非에쉬레 제품들도 경험이 있지만 오늘의 주제는 아니다.

먼저 종합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버터를 중심으로 만든, "가짜로부터 탄생한 진짜"라고 할 수 있는 버터 젤라또의 기획은 성공적이었다. 조야한 피오르 디 라떼 따위를 서울에서 찾지 않아도 될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떻게 마련한 대안들은 있었지만 이번에 등장한 두 버터는 피오르 디 라떼의 모방이나 약점의 극복을 넘어선 새로운 지평선마저 엿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유효했으며, 그러면서도 서로를 닮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유효했다.

가장 나빴던 것부터 말하자면 에쉬레 본점의 글라세 에쉬레였다. 이 취재를 위해 평소같으면 하지 않을 1시간의 대기를 감수했다(그리고 주변인들을 위한 선물만 잔뜩 샀다.) 젤라또 전문 메이커로 라뒤레나 무인양품의 아이스크림 생산도 맡고 있는 카와이 코퍼레이션의 제품인데 첫 맛에 확실한 버터 뉘앙스, 그리고 정중한 유제품의 단맛이 좋지만 버터의 여운이 짧다는 인상이 강했으며 텍스처는 영하 18도 제품임을 감안해도 좋지 않았다. 평범한 보관상태의 하겐다즈와 비교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기술적으로만 보면 굉장한 고지방의 제품임에도 그 강점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탕고의 에쉬레였는데, 자신의 버터 젤라또를 스스로 뛰어넘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버터 뿐 아니라 레시피가 전체적으로 달라졌는데 이걸 먹고 나니 기존의 버터 젤라또의 흠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계가 높아졌다. 버터의 향이 선명하고 그 향을 받아주는 단맛의 흐름이 좋은 가운데 텍스처가 훌륭하다. 아슬아슬하게 저항하지 않으면서 입안에서 녹아 내리듯 풀어지는 흐름의 연속이 좋다. 버터를 먹는다는 감상을 떠올리게 하면서 아이스크림의 본분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일상에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을 갖췄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물건은 버터가 주인공인, 그렇지만 아니었던 더마틴의 에쉬레였다. 유지방의 고소함이 매우 강하면서도 젖산의 신맛이 그를 되받을 정도로 다시 빛난다. 버터를 이용해 우유의 흠을 메꾼다는 기획에서 나아가 발효 유제품이라는 특징에 착안해 이를 강조한 발상은 충격적이면서도 긍정적이다. 이 제품의 정확한 이름은 버터맛이 아닌 발효맛이다. 잘 익은 사워도우의 아름다움이 얼음 송이 사이에서 피어난다. 피오르 디 라떼 따위가 아니면 어떤가. 탐닉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서울의 두 가게가 보여준 에쉬레 기획은 아이스크림이라는 점에서만 보면 에쉬레의 자체 제품을 뛰어넘었다. 물론 에쉬레 메종 드 뵈르에서는 기름 뚝뚝 흐르는 크로아상부터 한정 버터 케이크까지(그리고 에쉬레가 커다랗게 찍힌 쇼핑백!) 여러 제품을 선보이지만 버터를 차갑고 달게 먹겠다는 무모한 욕심을 위해서라면 프랑스도 도쿄도 불필요하다. 유제품이 빈곤한 서울의 환경이 만든 두 걸작이다. 낙농업과 같이 현실에 꺾여 스러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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