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큔 - 조건부 요리의 명암

카페 큔 - 조건부 요리의 명암

얼마 전 나를 괴롭혔던 정조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보통 책 보는 버릇을 생각하면, 가장 오래동안 열어보지 않았을, 즉 책장 가장 모서리에 예쁘게 정렬되어 있는 두 책이 연달아 「노마 발효 가이드」와 「Ottolenghi FLAVORS」였다. 전자야 한역판도 나오고 뭐 표지가 한국의 손맛이니 뭐니 애국정신(?)에 힘입어 썩 인지도가 있는 책이지만 요탐 오토렝기의 최근 작품이 있다니 새삼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사실 이 두 가지의 책의 영혼만 제대로 뽑아내어도 엄청난 요리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물론 요탐 오토렝기와는 다른 뿌리를 가졌을 주방에서 굳이 중동 요리를 하지 않겠지만, 그 영혼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커리(KRW 16000)는 버터를 견과의 지방으로 대체한 점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마크니였는데, 신맛의 선명함에 놀랐다. 로마나 산 마르자노같은 플럼 토마토들을 떠올리게 하는 신맛에 적당히 흐르는 커리의 질감이 경쾌하다. 풍성한 신맛만큼이나 감칠맛이 모자라지 않아 탄수화물을 잡아당기는데 더해 캐슈넛 등이 쓰였을 지방의 균형까지 훌륭하다. 이게 발효의 힘인가? 만일 그렇다면 부디 계속 발효해달라.

다음은 밥이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기 그지없는 식약동원의 바이브가 보리밥을 타고 흐르지만 커리의 훌륭함 앞에서 보리는 씹을 거리 수준에서 양해가 가능하다. 사실 보리밥은 그 자체로 맛있는 만큼 단지 건강식의 기호로 쓰이는 현실이 불만이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는 중요한 맥락으로는 기능하지 않고 커리의 위대함에 적절히 묻어간다. 다만 역시 커리에 곁들이는 밥은 바스마티처럼 향의 보완이 가능한 종류는 아니더라도, 커리와 가능한 빠르게 어울리는 방향이 적합하지 않을까? 부차적으로 보여도 중요한 문제다.

마지막으로는 시각적 만족도와 밥-커리 사이에 맛의 얼굴을 책임질 채소들과 템페다. 일일히 하나하나 호명하며 "스시 오마카세"식으로 따지고 들고싶지는 않다. 그러나 탁월한 것과 정 반대인 것만 짚고 넘어가자. 먼저 엉망인 쪽은 피망이다. 적당히 그을린 것과 소테한 것들이 병렬로 늘어선 가운데, 피망은 서구적 맥락에서 피망을 굽는 이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살은 흔히 고기에 비유되듯이 부드럽고 물렁해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맛도 더한다. 표면을 직접 불에 데거나 연기를 쐬어 형성되는 풍미는 각별하다. 그러나 잠시 그을렸을 뿐 여전히 단단히 씹히는 피망에게는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커리에서 보여준 초월 위의 잉여로 남은, 먹을 수 있는 장식이었다. 반대로 갈색팽이와 마늘쫑은 한국적인 그리움을 커리 위에서 눈부시게 아름답게 그려낸다. 버섯이 선사하는 그리운 감칠맛과 마늘쫑의 즐거운 단맛, 소테의 솜씨 따위를 뜯어보는 대신 주저앉아 마늘쫑의 섬유질과 커리를 함꼐 씹는 경험만으로도 나는 이 땅에서 커리의 새로운 길을 걷는 기분을 느꼈다.

결론적으로, 큔의 커리는 비건식이어야 한다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그 한계를 초월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채소만을 요리해야 한다는 제한이 그들이 가진 매력을 한껏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고, 콩단백과 식물성 지방으로도 기타 동물성 재료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을 만큼 요리가 튼튼하다. 단지 커리가 굳이 오색찬란한 건더기들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므로, 토핑을 내는 습관은 개선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KRW 16000이라는 가격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카카오다다의 초콜릿을 마다하고 예산과 허기를 아껴 주문한 KRW 9000의 아이스크림은 정말 명확하게 어둠이었다. 이런 음식을 마주하면 정말 기운이 빠져서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한 스쿱의 가격이 KRW 9000이다. 아이스크림 타령을 이어가는 이로서 일종의 의무감을 느낀다. 이건 말해야 한다. 스스로 서울 최고를 자부하는 곳부터 남이 서울 최고라고 부르는 곳들을 넘어 호텔을 소환하는 가격이다. 아니, 호텔에서도 아이스크림은 지지부진하다. 신라호텔 다쿠아즈가 KRW 5200, 레스케이프의 르 살롱에서 쿠프 글라세를 KRW 16000에 냈다가 메뉴에서 곧바로 삭제되고 KRW 4000에 스쿱으로 팔고서야 그나마 좀 버텼다. 그런데 KRW 9000짜리 아이스크림이라고?

코코넛 크림을 발효해서 썼다는 아이스크림 베이스는 일단 젖산발효인지, 알코올 발효인지, 아니면 설마 단백질 구조 분해되는걸 이야기하는건지 모르겠는 가운데 무엇을 의도하였던지 멸망으로 향한다. 우유에서 아이스크림의 질감 형성에 기여하는건 유지방 뿐이 아니다. MSNF도 있다. 카제인이나 유청단백과 같은 것들의 빈칸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실 이 수준의 문제라고 느끼지도 않은게, 애초에 공기가 적당히 불어넣어져서 만들어지는지부터 의문이었다. 숟가락으로 파쇄하기 위해 강한 힘을 가해야 하는 순간 이걸 이렇게 구형으로 만들었을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면 설마 아이스볼 몰드에 넣고 만드는건 아니겠지. 힘껏 누르면 크레바스처럼 반으로 갈라지고 다시 반구를 자르고 자르다보면 적당한 크기의 덩이가 되어 숟가락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탄다. 이런 얼음을 씹어서 무슨 광명을 찾겠나.

맛의 선결문제부터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따지지는 않겠으나 놀랍게도 멀쩡히 말린 금귤과 이유를 모르겠는 꽃, 이전에도 비판한 바 있는 생색에 가까운 코코넛까지. 아이스크림이 KRW 9000에 닿기 위해 가야할 길을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어서 너무나 놀랍다. 이 아이스크림은 정확히 천년식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 가격은 단지 유지방과 유단백으로부터 격리된 채식인들을 인질로 삼아 책정된 가산세고 벌금이다. 어차피 너희 채식인들은 맛 없어도 사먹잖아. 조리과학의 발전? 기술의 발달? 채식인들은 이런걸 누리면 안되는가. 비건 아이스크림이랄게 없어서 스스로 성분표 찾아읽으며 죠스바, 탱크보이같은 돌맹이들 아이스크림이랍시고 씹어온 채식인들의 아픔은 나는 안다. 그래서 나뚜루가 더욱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 아이스크림은 채식인과 아이스크림 애호가를 동시에 모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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