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티스트 - 무화과 파블로바
사계절 내내 즐기기 좋은 제품은 많지 않은데 유행은 계속 바뀌며 계절을 강조하는 제품이 늘어나고 있는 제과의 현상황은 크게 달갑지 않다. 다들 재료를 강조하지만 버터와 밀가루를 좋은 것을 쓸 수 없는 현실이며 또 기술을 강조하지만 아침부터 과자점에 달려갈 수 있는 인생이 아니면 이런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다. 애초에 재료가 비싸고 다들 영세한 덕에 복불복 수준의 케이크 고르기의 비용마저도 높다. 제과 학원 졸업장 정도가 믿을만한 레퍼런스의 전부인 케이크를 먹는 데에도 서울에서는 기타 대도시, 도쿄는 물론이고 뉴욕이나 런던의 오트 디저트보다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 속에서도 영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면 무화과다. 애당초 온난하고 비가 적은 환경에 적절한 식물으로 미국에서도 최소 USDA Zone 8a~b 아래의 지역, 즉 남부나 서부 해안가에서 기르며 유럽의 경우 지중해에서 북쪽으로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남쪽으로는 튀니지의 제바가 명산일 정도로 명백하게 지중해성 기후에 어울리는 식물이다. 로마 시절부터 카르타고가 무화과의 명산지로 이름이 드높은 나머지 전쟁까지 했었다(「플루타크」) 물론 그렇게 치면 극단적인 반도 기후에 진정 어울리는 것이 몇 가지나 있겠냐는 반문도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무화과는 딸기의 전철을 밟아 과육을 끼얹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더욱 문제적이다. 딸기 뷔페 다음은 무화과 뷔페라도 등장할 심산인가. 그리고 또 사진과 동영상을 찾는 사람들은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설 것이다. 미각에 대한 열정과 지식을 자부하던 이들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미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무화과가 나쁜 과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며, 그러니 한국산 무화과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 아니다. 과일에게는 과일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사과를 파이로 굽거나 잼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한 줌 쥐면 더 없을 것 같이 좁은 서울의 제과 시장의 과반이 한 가지 주제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이런 최소한의 고민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우려할 수밖에 없다.
디저티스트의 파블로바는 이러한 유행에 적절히 편승하면서도 파블로바라는 형식을 통해 나름의 당위를 갖췄다. 원래 과일 잔뜩 올린 것이 미덕인 파블로바 아닌가. 맛의 당위성은 신맛에서 찾는다. 발효 크림 비스무리한 뉘앙스의 크림과 루바브로 이어지는 신맛은 무화과의 단맛보다도 아름답다. 무화과와 루바브의 조합은 아주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루바브 자체가 본격적으로 식탁에서 활용된 것은 20세기 지나서인 만큼 Éric Birlouez, Petite et grande histoire des légumes : consommée comme un fruit !, Quæ, coll. « Carnets de sciences », 2020여전히 생각해볼 여지는 많았다. 확실히 신맛이 없는 과일이라 언제나 신맛이 짝으로 붙어다닌다. 식초를 넣고 처트니를 만들어야 푸아 그라에 견줄 맛이 나고 알랭 파사르는 토마토와 매치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으니 맥락은 한결같다. 루바브 역시 뼈대가 되는 역할은 같은데 좋은 신맛 가운데 무화과의 역할은 의문이었다. 설익은 무화과의 오이나 수박 향도 아니고 다 익은 무화과의 핵과류나 베리류를 연상하게 하는 과일스러움, 어느 쪽에도 강하게 치우치지 않은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당도가 높은 과일이라는 점이다. 제과에서 과연 이런 과일의 의미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는 가운데 바탕이 되는 것이 과연 역시 단맛 일변도의 머랭이라면 고민은 더 커진다. 가루 비슷한 것이 조금 붙어 나름 바닥 역할을 자처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나쁜 디저트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제품이었는데 이유는 역시 신맛 덕분이었다. 전체적인 단맛의 크기와 그에 견주는 두 겹의 신맛의 조화가 좋았고 바스러지는 머랭부터 과육 바깥 부분이 살짝 겉도는 무화과까지 씹으며 녹아드는 순서도 썩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다만 지방의 짝으로 쓰이는 경우가 아닌 스스로 서기 위한 무화과라면 고민이 필요했다. 피에르 에르메처럼 아예 디저트에도 푸아 그라를 넣는다는지 한다면 지나친 것이겠지만 그만큼 짝의 빈자리가 주는 느낌은 절실했다. 굳이 여기에 게시하지는 않겠지만 더 끔찍한 발상의 무화과들은 넘친다. 화려한 인상으로 매혹하지만 돌아보면 글쎄, 눈을 감으면 과연 그 인상이 남을까. 사실 카트르 카르를 잘 만드는게 훨씬 급한 과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 같이 보기 : 「디저티스트」